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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가난이 사는 집, 판자촌의 삶과 죽음_m1

드치킨 2025. 5. 19. 23:57

 

김수현, 가난이 사는 집

 

 

 

목차 

 

 

 

메모

1장. 집 

- 인류의 역사를 5,000년 정도로 본다면 대부분은 농경사회 

Q. 국가 운영의 핵심? 어떻게 하면 모든 인구가 농경지를 놀리지 않고 부지런히 농사짓도록 하느냐? 

- 산업혁명 + 공업생산 

Q. 농토에 묶여 있던 농민들을 도시 노동력으로 어떻게 활용하냐? 

 

1960년 서울 인구 244만 명 (전국 인구의 10%) > 1990년 1,100만명 

서울과 대도시에는 인구 폭발이 일어났고, 잠잘 곳을 찾지 못한 이농빈민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25P 

서울은 조선 후기부터 극심한 빈곤과 사회 변화 속에서 농촌을 떠난 유민들이 몰려들던 곳이었다.  

- 가가 : 임시로 지은 집

- 토막 : 흙 위에 가마니 같은 덮개를 덮었다는 뜻의 토막 

- 토막촌 : 토막이 모여있는 곳 

 

1920's 서울에서 토막이 본격적으로 늘어남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정립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전국적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잃게 된 농민들이 속출, 일제와 지주의 수탈로 몰락한 농민들이 극빈층으로 전락)

1939's 경성부 사회과가 밝힌 토막민의 숫자는 7,625호 (3만 6,420명) 당시 서울 인구의 4% 내외가 토막에 살았음

해방 이후 : 해외 귀환 동포들이 몰려옴 + 혼란한 정치 상황 = 도시 빈곤층의 급증

1960's 산업화 추진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 이동 = 도시화 / 서울 인구 244만 명 

1966~71 정부가 본격적으로 판자폰 문제에 관여 (15만동의  판자촌 정리&재배치, 시민아파트 449동 1만 7천호가 지어짐)

 

but,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으로 정부의 정책 선회 계기가 됨 

 

55p

판자촌은 집도 집이지만 골목길이 중요하다. 판잣집이 처음 8평으로 구획될 당시에는 지형을 봐서 대충 잘랐다면, 실제 집이 지어지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집터는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변화해갔다. 때로 두 집을 하나로 합치기도 하고, 하나의 집을 둘로 나누기도 했지만, 지형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판잣집들을 연결한 골목길은 바로 이런 유기적인 변화를 담아내는 그릇이자 그 변화의 결과였다. 다시 말해 터를 만들고 변화해온 과정이 곧 판자촌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2장. 사람

75p

이렇게 모두가 가난했지만, 특히 농촌을 떠나 도시로 막 들어온 사람들의 사정은 더 어려웠다. 일단 몸을 누일 싼 곳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런 점에서 불법적이고 불량한 주택이 모여 있던 판자촌은 대도시에서 가장 싼 곳이었다. 

 

 

3장. 사건

119p

불은 주로 겨울에 동네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사망 사고도 빈발했다. 주요 피해자는 혼자있던 노인이나 아동, 아기들이었다. 

 

145p

한 여름 광주대단지 한쪽에서는 서울에서 가재도구를 실은 철거민 트럭이 몰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분양권으로 돈을 벌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굶는 사람들까지 속출하는 가운데 거리는 소란했고 사람들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152p

그리고 1989년 성남시에는 또 하나의 신도시가 들어섰다. 바로 분당이다. 광주대단지 남쪽 편에 당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선망하는 주거지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구 약 40만 명의 신도시였다. 위쪽에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모은 신도시가, 아래쪽에는 가장 부자들이 사는 신도시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건설되었다. 지금 성남시청은 그 겅계에 새로 지어졌다. 인구 97만 명의 '두 도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153p

실제 판자촌의 역사는 철거의 역사나 다름없었고, 그에 저항에 싸운 역사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불법 가건물부터 일제시대의 토막, 해방 이후의 판자촌까지, 주인이 없거나 버려진 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무단으로 집을 짓고 , 이를 소유자나 공권력이 나서 부수는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었다 .